
벌거벗은 디자이너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앱을 완성하는 일이 거의 공짜가 되면서 결과물이 실력을 증명해주지 못하게 됨마감과 유창함은 쉬워졌지만,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임AI가 만드는 속도보다 중요한 질문은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의미 있는 것을 만든 때가 언제였는가임
원문 보기 — Microsoft Design — Matthew Santone ↗픽셀은 정리되어 있고, 글자는 정확히 맞아 있었다. 결과물이 대신 말해주니 나는 말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만드는 일의 비용이 내려가면서, 결과물이 더는 나를 증명해주지 못하게 됐다.
나는 경력 대부분을 결과물을 만드는 일(craft) 뒤에 숨었다. 만드는 일은 쉽지 않고, 잘하려면 수년이 걸린다. 하지만 그 일이 조용히 해온 역할이 있었다. 누군가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해준 것임.
‘이 사람은 자신이 뭘 하는지 아는가?’
이제 인터페이스를 설명하면 곧바로 나타난다. 두 회의 사이에 앱 하나를 만들 수도 있다. 내가 숨었던 실행의 비용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계속 같은 불편한 곳에 도착한다.
이제 결과물이 나를 대신해 말해줄 수 없다. 만드는 일이 더는 어려운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정말 할 말이 있는가?
이것이 맨몸이 된 디자이너다. AI에게 노출된 것이 아니라, AI가 싸게 만든 것 때문에 드러난 사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내가 신경 썼다는 증거가 아니게 되면, 더는 숨을 곳이 없다.
만드는 일이 가림막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내가 잘하던 일이 결국 분해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법처럼 보였던 것은 내가 보지 못한 부분들의 조합이었다. 그렇다면 만드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특별하지 않았던 걸까.
도구를 탓하기 쉽지만 도구가 무언가를 빼앗은 것은 아니다. 실을 잡아당겼을 뿐이다.
만드는 일은 기술만이 아니라 옷이 되어 있었다. 나는 결과물이 회의를 대신 치르고, 내가 조용히 있어도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이 늘 말해준다면 내가 직접 말할 수 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 자세의 일부는 겸손이 아니라 숨기기였음.
완성도의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다. 작업이 나빠서가 아니다. 누구나 오후 한나절이면 ‘충분히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감이 비쌌을 때 마감은 신호였다. 이제 광택이 공짜라면 공짜 신호는 신호가 아니다.
여기서 함정이 생긴다. 노출을 느끼기도 전에 덮개를 찾는다. AI의 답을 가져오고, 틀렸는데도 받아들이며, 스스로 더 확신이 생겼다고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항복(cognitive surrender)이라고 부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완전히 드러나 있으면서도, 일을 아주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다.
그다음은 쉽다. 더 많이 만드는 것. 나도 그렇게 조언하곤 했다. 지휘자가 되어 판단으로 신호와 잡음을 가르라고. 그 말은 지혜처럼 들리지만, 정작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지 멈춰 묻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일 수 있다.
‘전에는 잘했으니, 이제 백 배 빠르게 잘해라.’
만들고 또 만들면서 질문은 피한다. 그렇게 산출물의 가치는 조용히 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슬롭(slop)은 기계가 만든 나쁜 작업이 아니다. 자신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견디지 못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내뿜는 배기 가스에 가깝다. 빠져나갈 길은 더 많이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안쪽, 실제로 내가 할 말이 있는 곳에 있었다.

20년 동안 붙잡고 있던 포의 이야기
에드거 앨런 포의 「작법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mposition)」을 읽은 뒤 20년이 지나도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포는 「갈가마귀(The Raven)」를 거꾸로 설계했다고 썼다. 먼저 긴 ‘o’의 애도하는 소리를 가진 ‘Nevermore’를 고르고, 그 말을 전달할 새를 나중에 발명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글은 대부분 연출이었다. 시는 모든 것이 그렇듯 엉망인 상태에서 나왔고, 포가 설명한 깔끔한 기계는 나중에 통제된 것처럼 보이도록 조립됐다. 그래도 20년이 지나서야 이해한 것이 있다. 통제는 가짜였지만 선택은 진짜였다. 포는 소리 때문에 ‘Nevermore’를 골랐다. 그의 천재성은 작법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라 귀에 있었다. 거짓말은 정돈된 설명에 있었고, 혼란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은 싸지지 않았다.
AI는 이제 시를 만들 수 있다. 작가의 말을 설명하는 문장도 쓸 수 있다. 양쪽 끝의 비용이 내려간 뒤 남는 것은 선택이 진짜였는지다. 실제로 고민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고민한 척했는지의 문제임.
그 고민이 확신이다. 어떤 모델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부분이다. 출력이 아니라, 할 말이 있다는 상태이기 때문.
이 점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만드는 일 뒤에 너무 오래 있었고, 그것을 치우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확신이 없다. 수사적인 걱정이 아니다. 지금 이 글에서 가장 평범하고 정확한 사실로 말하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데, 남은 경력 내내 내가 사실 아무 말도 할 게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될까 봐 진심으로 두렵다.
만드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드는 일은 연습할 수 있다. 관점을 가지려면 문제를 향한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지 알아야 한다.
모델은 수천 개의 방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 신경 쓸 수는 없다. 확신이든 확신의 부재든 똑같이 유창하게 실행하고, 내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알려주지 않는다. 신경 쓰는 일은 내 몫이다. 처음부터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을 일이었음.
나만을 위한 불
치료사가 워크시트를 하나 줬다. 누구에게나 건네는 종류의 것,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붙잡는 칸이 있는 표였다. 나는 그것을 Claude Code에 넣었고, 한 시간 뒤에는 내 휴대폰에서 작동하는 앱이 되어 있었다. 내 불안이 말하는 방식에 맞춘, 온전히 내 앱이었다. 실제로 도움이 됐다.
그런데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완성은 AI가 쉽게 만든 유일한 행위다. 무료로 완성을 주고, 그러면서 완성에 대한 애정도 공짜로 건네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앱이 정말 나를 도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그것을 완성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완성한 순간이야말로 둘을 구분할 능력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 워크시트는 공유되는 것이었다. 수백 명이 같은 표, 같은 종이와 함께 앉았다.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작은 위안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져다가 개인의 불로 만들었다.
확신이 싸지 않은 것이고, 확신이 혼자만의 것이라면, 이제 누구나 원하는 모든 것의 맞춤형 버전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나누던 것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불을 붙인 사람에게 맞춰진 10억 개의 개인적인 불,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닿는 온기는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될까.

시대정신이 되는 것들은 가장 많이 생산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많이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어느 여름 모두가 알던 노래는 한 사람이 할 말이 있었고, 그것을 우리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퍼졌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향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의미는 여전히 비용이 드는 부분이고, 바깥을 향할 때만 의미가 있다.
맨몸이 된 디자이너가 다시 덮개를 찾기 전에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다. 이제 만들 수 있다. 우리 모두 만들 수 있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만든 때가 언제였는가?
crit의 관점
AI가 디자이너의 손을 빼앗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제는 결과물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 실력이나 의도를 보여주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왜 그것을 골랐는지다. 그런데 관점만으로 품질과 책임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할 말이 있다’는 기준이 말 잘하는 사람의 포장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걸 어떻게 가려낼지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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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이미지 — Matthew Santone / Microsoft Design 원문
- 본문 이미지 — Matthew Santone / Microsoft Design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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